日韓通訳・翻訳の単語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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翻訳:日→韓 일본에서 그리스도교가 확산되지 못한 이유

原文:


翻訳文

일본에서 그리스도교가 확산되지 못한 이유

전체 인구의 1%이하, 세계 최대 ‘비 일신교 국가’의 수수께끼

시마다 히로미 (종교학자)

전세계에는 그리스도교도가 23억명, 이슬람교도가 16억명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의 그리스도교도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모두 포함해도 100만명 가량으로 전체 인구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편 이슬람교는 일본인 신자는 약 만 명 가량으로, 외국인을 포함해도 10만명을 간신히 넘는다.

이는 주목 받을 만한 사실인데, 여러 국가들 가운데 이렇게까지 일신교를 믿는 사람이 적은 곳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일신교가 스며들지 못한 가장 큰 나라이다.

이슬람교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일본인이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해외에서 이슬람교도가 일본 국내로 들어오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반면 그리스도교는 16세기에 이미 전래되었다. 그 후 금교령(禁教)이 내려지기는 했으나, 메이지(明治) 시대에 접어들면서 금교령이 해제되고 각국에서 선교사가 파송 되어 그리스도교 계열의 이른바 미션스쿨도 전국 여러 곳에 지어졌다.

세계 2차대전 이전에는 국가신도체제(国家神道体制) 하에서 그리스도교 포교에도 제한이 가해졌으나 전후에는 새로운 헌법 체제가 성립되고 종교의 자유가 확립되어 자유롭게 포교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도의 비율이 높아졌다. 2차대전 이전의 신도 수는 30만명 가량이었으므로 지금은 약 세배로 증가한 것이다. 종전 직후에는 미국이 중심이 된 연합국의 점령하에 놓인 것도 한 몫 하여 한때는 그리스도교 붐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그리스도교의 교세는 확대되지 못했고 사회적으로도 주목 받는 일이 드물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계열의 지식인, 문학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작가는 소노 아야코 뿐이다. 한때는 문학 장르를 형성하기도 했던 그리스도교 문학은 거의 소멸되고 있다. 무교회파 그리스도교도가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영향력을 갖는 일도 없어졌다. 그리스도교는 일본에서 신자 수를 증가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지적 세계에서의 영향력 조차도 잃어버린 실정이다.

 복음파의 ‘벽’으로 작용한 것

그리스도교는 왜 이렇게까지 일본에 수용되지 않았을까? 일본의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생긴 중요한 의문이자 과제이다.

이는 그리스도교문학이 아직 주목을 받고 있던 시절, 가톨릭 신자인 엔도 슈사쿠가 대표작 ‘침묵’에서 내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엔도 슈사쿠는 신앙을 포기한 포르투갈인 신부를 ‘침묵’에 등장시켜 “이 나라는 모든 것을 썩어버리게 하는 바닥 없는 늪” 이라는 대사를 주었다.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2차대전 이후로 한정해보면 몸집을 불릴 절호의 환경이 갖춰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교세가 확대되지 못했던 것은 창가학회(創価学会)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경제 발전이 현저한 나라에서는 프로테스탄트 복음파 신자가 증가한다. 그리스도교도가 30%를 차지하는 한국도 그러하며 중국에서도 최근에는 그리스도교도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주 원동력은 중국정부로부터 공인 받지 못한 지하교회(혹은 가정교회)이며 대부분은 복음파 계열이다.

복음파는 질병의 치유와 현세의 복을 내걸고 선동적 설교를 하는 카리스마적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집단이다. 가톨릭의 아성인 브라질에서도 복음파로 개종하는 사람이 폭발적인 기세로 증가하여 바티칸이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일본도 종전 후에 고도 경제성장의 형태로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경험한 바 있다. 그 시절에 그리스도교 복음파 세력이 확대 되었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전후에 세력을 확대한 집단은 창가학회와 입정교성회(立正佼成会), 영우회(霊友会) 등 니치렌(日蓮) 계열의 신흥 종교였다. 특히 창가학회는 경이로운 성장세를 보였으며 지금은 전국민의 3%를 회원으로 두고 있다. 창가학회만으로 그리스도교도의 네 배 가량에 해당하는 신자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전후 창가학회를 이끈 것은 제 2대 회장인 토다 죠세이이다. 그는 현세의 복의 실현을 내걸고 특유의 서민적인 말투로 많은 회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창가학회는 경제성장을 경험한 국가에서 복음파가 했던 역할을 답습했다. 심지어 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정치 권력과 동떨어져있던 서민에게 선거활동을 통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당연하게도 복음파가 일본에 파고들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했던 한국 복음파 목사가 선교를 중단한 이유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창가학회를 비롯한 니치렌 계열 신흥 종교는 그리스도교를 일본에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는 벽이었던 것이다.

미션스쿨은 많은데

일본에 그리스도교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예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미션스쿨의 숫자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종교를 기반에 둔 학교는 전국에 849곳 있다. 이중에 565곳이 그리스도교 계열이며 전체에서 차지는 비율은 66.5%에 이른다. 즉 3분의 2가 그리스도교 계열의 학교인 것이다.

또한 미션스쿨 중에는 대학 진학으로 유명한 학교가 적지 않다. 바로 가나가와에 있는 에이코우 학원(栄光学園)이나 세이코우 학원(聖光学院), 가고시마의 라살(ラ・サル), 히로시마의 히로시마 학원(広島学院) 등이다. (다치바나키 토시아키, <종교와 학교>, 가와데 북스)

미션스쿨 중에서도 특히 가톨릭 계열의 경우에는 상당히 열정적인 종교 교육이 이뤄지고 있으며 예배 참여를 의무화 한 곳도 있다.

따라서 특히 사춘기의 학생이 다니는 중고등학교 단계에서는 종교적 배경 면에서 영향을 받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졸업 후에 신자가 아니었던 학생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도가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미션스쿨은 메이지시대에 접어들고 금교령이 해제되면서 차례로 생겨났으며, 교회와 수도회도 그 수를 늘리기 위해 힘썼다. 물론 이는 포교활동의 일환이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략은 한편으로는 성공했다. 미션스쿨은 지금도 명문학교로서 일본 교육계에서 일대 세력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교활동의 면에서는 성과를 올렸다고 보기 어렵다. 매년 배출되는 미션스쿨 졸업생은 50만명에 달하며 고등학교 졸업생만으로도 15만명을 넘지만 이러한 수치가 신자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 사실 또한 일본사회와 그리스도교와의 관계에 얽힌 의문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 사회는 교육기관으로서의 미션스쿨은 이용하고 있으나, 신앙을 뿌리내리게 하는 기능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훼방을 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 막고 있는지를 설명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미션스쿨에 자녀를 보내는 부모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경우가 많다. 애초에 신자 수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션스쿨 졸업생은 가족과 친지 중에서 그리스도교도를 찾기 어렵다. 게다가 자녀를 미션스쿨에 보내는 가정은 친지들과의 정이 끈끈하고, 그만큼 관혼상제에 참석할 일도 많다.

미션스쿨 졸업생은 여자가 많고 그들이 결혼하는 경우에도 배우자 가정이 유복하고 관혼상제에 열심히 참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신도, 불교와 연관 될 일이 많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로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교에 공감하면서도 세례를 받지는 않겠다는 졸업생이 다수를 점하게 되고, 그 결과 그리스도교 신자가 늘지 않는 것이다.

신흥종교 신자들도 부모가 그 종교의 신자였던 경우가 많다. 신흥종교가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에는 새로운 신자가 계속 유입되지만 안정기를 거쳐 정체기에 접어들면 신앙 2세, 3세들이 명맥을 이어가는 경향이 강해진다. 창가학회 등이 강압적인 절복(折伏)운동으로 회원 수를 불렸으나 지금은 자녀, 손자들에 의해 신앙이 이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리스도교가 일본에서 신자를 불리기 위해서는 가정 전체를 끌어들이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즉 ‘창가 가정(創価家庭)’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가정’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창가학회는 회원이 되면 니치렌의 만다라 복제판을 받게 되고 이것을 불단(仏壇)에 모신 후에, 날마다 그 앞에서‘나무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経)’를 반복해야 한다. 때문에 개인이 아닌 세대를 단위로 회원 수를 헤아린 것이다.

메이지 이후 그리스도교에 귀의 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청년층이었으며, 그들은 자신은 신앙을 가져도 가족에게 전하지는 못했다. 청년층은 관혼상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의 신앙을 관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정을 갖고 관혼상제에 관여하게 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장애물이 되었다. 가족 전체를 그리스도교도로 만들지 않는 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세대 단위였던 일본인의 종교가 그리스도교 확대의 가장 큰 훼방꾼이었다.

데우스”는 “대일(大日)”

물론 일본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도 적용 될 수 있는 사례도 있다.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도가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며, 이는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사회가 크게 변화하지 않는 한, 신앙은 가정 혹은 지역을 통해 전달된다

새로운 종교가 전래될 때에는 아무리 점을 많이 늘린다 한들 세력이 확대되지 않는다. 개인 단위로는 확장이 불가능한 것이다. 선에서 면이 되었을 때 비로소 확대 현상이 일어난다. 다름아닌 전후 창가학회가 가정과 지역을 통째로 회원으로 만들고, 세력을 면으로 확대해간 것이다.

일본의 그리스도교가 면으로 확대되었던 때는 전래 초기뿐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신자가 크게 증가하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도인 영주가 차례로 나타났던 것도 그만큼 그리스도교가 깊이 침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교는 금지 되었고, 선교사들은 추방되었으며 신자들은 극심한 박해를 당했다. 신앙을 숨겨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숨은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서는 그 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인지 신앙이 변형되었으며 일본의 토착신앙과 뒤섞이고 말았다.

일본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전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는 “데우스(신)”을 “대일(大日)”이라고 칭하는 등 불교 일파로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그 외에도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설명을 불교용어를 활용하여 번역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처음에는 불교 승려에게 환영받기도 했지만 당시 일본사회에서는 불교 신앙이 서민층에도 깊이 뿌리내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장벽이 높았다. 불교용어를 번역에 활용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독자성이 이해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독자적인 종교 세계

동남아시아 가운데 유일한 그리스도교 국가가 바로 필리핀이다. 필리핀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시기는 일본과 같은 16세기이다. 지금도 그리스도교의 비율은 90%가 넘고 그 대부분은 가톨릭이다.

같은 시기에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필리핀은 대조적인 결과를 보였다. 필리핀에는 이슬람교도 전해졌으나, 인도의 힌두교와 중국을 경유한 불교 등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던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는 불교와 신도가 그리스도교를 가로막는 벽이었지만 필리핀에서는 그러한 장애물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16세기 무렵 토착신앙인 신도가 있던 자리에 불교가 전파되어 조정과 귀족 층을 중심으로 수용되었다. 불교는 신도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신도를 불교 신앙 세계로 끌어들였다. 중세에는 ‘신불 습합(神仏習合)’ 신앙이 확립되었다. 여기에 헤이안(平安) 시대의 끝 무렵에 대두한 무가(武家)도 가세하여 이윽고 서민층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교가 확대될 여지는 없었다. 일본에 하비에르에 대한 자료가 일절 남아있지 않은 것도 딱히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스도교 금교 조치는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 등 저항을 낳았지만 결국에는 제압되고 말았다. 메이지 시대에 금교령이 해제되었을 때 일본은 신도를 국민적 도덕으로 내세우는 방향으로 이미 전환한 상태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반드시 국가 방침에 찬성하지는 않는 일부 지식인층으로 활로를 모색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교육 기회의 제공 면에서는 이용당하고, 신앙으로서의 그리스도교는 간판만 남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그리스도교를 능가하는 기세를 보이는 이슬람교가 일본에 뿌리내릴 여지 또한 없다(앞으로 이민 증가에 따라서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일본은 한번도 일신교에 사로잡힌 적이 없는 나라로서 앞으로도 독자적 종교 세계를 유지해 나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러한 일본의 양상이 세계적으로 주목 받게 될지도 모른다.